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제국 (문단 편집) === 쇠퇴와 중흥 === 한편 1618년 [[30년 전쟁]]이 터지고, 에스파냐가 [[오스트리아 대공국]]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원하여 전비(戰費) 부담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데다,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[[네덜란드 공화국]]의 아시아 교역 지대에서의 [[해적]] 행위를 스페인 정부가 제대로 막지 못하자[* 사실 스페인은 유럽 본토에서도 네덜란드 독립군 함대인 일명 '고이센(바다의 거지떼)'이 마구잡이로 저지르는 해적질과 약탈을 제대로 못막을 만큼 해군력이 부실했다.]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진 포르투갈 쪽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. 결국 [[30년 전쟁]] 중이던 1640년 포르투갈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스페인군과 관료들을 몰아내고 독립을 선언했으며, 60년 만에 스페인-포르투갈의 동군연합은 와해되고 포르투갈에는 브라간사 왕조가 들어섰다.[* 이 [[이베리아 연합]] 기간동안 [[네덜란드-포르투갈 전쟁|포르투갈은 네덜란드에 밀려]] 아시아지역 식민 거점을 하나 둘 잃기 시작했다. 다행히 브라질은 1663년 수복했지만 [[말라카]]를 잃은것은 정말 뼈아팠다(...). 사실 말라카는 현재에서도 가장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손꼽히는 곳이다. 오죽하면 아직도 해적들이 말라카 해협에서 날뛸 정도.] 이와 비슷하게 카스티야 중심의 강압 정치와 종교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세금 부담에 짓눌린 [[카탈루냐]]는 포르투갈의 독립에 자극을 받아, [[프랑스 왕국]]의 [[루이 13세]]의 지원을 기반으로 1640년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. 이 전쟁은 1652년까지 무려 12년이나 지속되어 스페인에 엄청난 부담을 주었으며, 설상가상으로 1641년에는 안달루시아, 1647년에는 남이탈리아의 속령인 [[나폴리]] 왕국, 1648년에는 [[아라곤]] 본토가 모반을 꾀했으며, 스페인은 이 모든 반란 기도를 진압하기 위해 엄청난 국력을 쏟아부어야 했다.[* 현재 이들 지역은 남이탈리아 빼고 모두 스페인 영토이긴 하나 카탈루냐 지역은 특히 반(反) 카스티야적인 자립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툭하면 분리 독립 논의가 불거지곤 한다.] 여기에 30년 전쟁의 패전으로 1648년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, 프랑스와 계속된 전쟁으로 1659년 플랑드르 남서부의 아르투아와 페르피냥이 속한 로세욘 지방을 할양해야 했다. 이리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친혼이 거듭된 끝에 태어난 [[카를로스 2세]] ^^(재위: 1665년 ~ 1700년)^^ 시대에 이르러서는 1678년에는 [[스위스]] 접경의 영토인 프랑슈-콩테를 프랑스에 넘겨주더니,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[[보르본 왕가]]로 왕위가 넘어간 뒤 플랑드르와 나폴리 왕국 등의 유럽 영토는 오스트리아에게 넘겨주며 상실하게 된다. 이후로 [[보르본 왕조]]가 스페인을 지배하였고 운이 좋게도 현명한 왕들이 나와서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. [[카를로스 3세]] 시기에 이르러 스페인의 아메리카 영토는 남부 아르헨티나에서 미국 서부와 남부, 중부지방 및 캐나다 남쪽까지 이르게 되었고 내실도 튼튼히 다졌다. 펠리페 5세는 유럽과 신대륙의 무역을 장려하고 국내 발전에 힘써 100여년 동안 스페인은 태평성대를 이루었고 [[카를로스 3세]] 시기에 루이지애나도 획득하는 등 중흥하였다. 키를로스 3세는 [[예수회]]를 추방하고 종교재판 규정을 완화했다. 또한 [[캘리포니아]]와 애리조나 등 북미 식민지 경영에 적극적이었으며 북미 여러곳에 스페인 탐험대가 파견되었다.[* 캐나다 서부 벤쿠버나 [[알레스카]]앞바다에 뜬금없이 스페인어 지명이 붙은 이유이다. 당시 영국이 [[제임스 쿡]]을 앞세워 태평양의 남은 도서지역 위주로 탐험을 했다면 스페인은 호세 페르난데스나 호세 나바레즈 등의 탐험가들이 태평양 연안위주로 탐험을 했다.] 이 무렵 스페인 식민제국의 영토가 가장 넓었다. [[미국 독립 전쟁]]에서는 신생 미합중국을 지지하여 1779년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프랑스와 같이 지원군을 파견했다. 지브롤터에서는 [[세인트빈센트 곶 해전(1780)|세인트빈센트 곶 해전]]을 시작으로, 아메리카에서는 과테말라와 니카라과(산 후안 공방전)에서 영국군과 충돌했고, 루이지애나에서는 1780년 5월 [[세인트루이스 전투]]에서 영국-인디언 연합군을 격파했다. 이후 스페인군은 1781년 1월 7일 모빌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781년 3월 9일 ~ 5월 8일 [[펜서콜라 공방전]]에서 영국령 식민지인 웨스트 플로리다 주의 수도인 펜서콜라를 공략했다. 이 대가로 1783년 파리조약때 스페인은 7년전쟁 당시 쿠바의 아바나와 맞바꿔 영국에 넘겨준 [[플로리다]]를 재탈환했다.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[[카를로스 4세]]가 즉위하였다. 하지만 프랑스에서 [[프랑스 혁명]]이 일어나고 그 영향이 스페인에게 번졌고 이는 스페인 황금기의 붕괴를 가져왔다.[* [[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]] 이후 들어선 [[보르본 왕조]]의 외교적 입장은 [[펠리페 5세]]와 [[루이 15세]] 치세에 벌어진 [[사국 동맹 전쟁]] 시기를 제외하면 항상 친(親) 부르봉 정책이었다. 때문에 혁명 초기 부르봉 왕조의 [[루이 16세]]가 [[단두대]]로 목이 달아나자, 제1차 대불동맹에 참여해 혁명정부와 적대했지만 이후 프랑스의 압력을 받고 자의반 타의반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